Serienz의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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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와인을 안 마신 건 아니었지만, 간만에 (거진 8개월 만에) 기록을 남겨 봅니다. 사진은 일행 중 사진을 찍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분이 참 예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히 공유 받았습니다 >_<



첫 번째 와인은 크룩 1996년 빈티지 (Krug, 1996) 입니다.


쉐리 오크 위스키인가? 꼬냑인가? 싶은 향히 코 끝을 간질이고, 균일하게 올라오는 기포감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청사과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아직 여기저기 노오란 빛깔을 가지고 있는 사과의 껍질에서 자연스레 피어 올라오는 청량한 과즙감, 서양배와 모과에서 느낄 수 있는 농후한 무게감, 아카시아 꿀이랄지 싶은 녹진함으로 마무리되는 향기의 레이어가 인상깊습니다.


입에서는 아직도 너무 어리다고나 할까요. 미끈덩거리는 유질감은 아직 동네 놀이터의 미끄럼틀을 타는 것이 썩 부끄럽지 않은 연령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혹은 중학생 정도의 느낌을 선사하면서 뒤따르는 실키함은 그래도 많이 숙성되었다! 라고 자랑하는 듯한 뉘앙스입니다. 청포도와 사과 속살을 깨물었을 때의 시원한 아삭함, 어린 듯하면서도 풍요로운 우유 풍의 텍스쳐는 귀족 집안의 한 영애를 보는 듯했습니다.


모임의 주최자는 크룩의 80년대는 이미 너무 지나간 듯하다고, 80년대 빈티지의 샴페인을 마실 거면 차라리 동일 빈티지의 돔 페리뇽을 마시겠다고 했었는데요, 돔 페리뇽 82, 85 빈티지를 마셔 본 입장에서 그 말에 공감은 하면서도, 크룩의 198 ~ 1992년 빈티지는 어떠한 느낌일지 살짝 기대가 되는 한 잔이었습니다.



두 번째 와인은 조셉 드루앵 마르키스 드 라귀슈 몽라쉐 그랑 크뤼 2008 빈티지 (Joseph Drouhin, Marquis de Laguiche Montrachet Grand Cru 2008) 입니다.


잔을 받자마자, 아주 약하고 미세한 알콜 부즈가 튑니다. 아직 10년 가량밖에 지나지 않아서일까요? 하지만 어느 새인지 사르르 가라앉고 유제품과 베리향, 마치 그릭 요거트에 블루베리 토핑을 올린 듯한 상큼하며 녹진한 향미가 맴돌게 됩니다. 처음의 알콜 부즈는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어 우유향이네 ~ 요구르트향이네 ~ ' 하면서 허물어질 수 있는 전체의 구조를 탄탄하게 지탱해 주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H빔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합니다.


입술을 타고 들어오느 느낌은 소금입니다. 강건하고 짜릿한 미네랄리티가 혀 끝에서부터 혀뿌리까지 바짝 당겨주고, 마치 소금물을 한 모금 가글하려 머금은 듯한 자극을 선사하면서 그 금속질의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고, 단순한 함미만이었다면 역함이 올라왔겠지만 그 사이사이로 적절한 산도가 치고 들어오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입 안을 여기저기 휘돌아간 다음에는 아까 향으로 느꼈던 유제품의 텍스쳐로, 소금기와 산도에 깜짝 놀란 미뢰를 쓰다듬으면서 자연스레 혀의 양 끝으로부터 군침이 돌게 만들어주면서 마무리짓습니다. 향으로 느꼈을 때보다도 한층 더 낮게 느껴지는 온도감으로 오히려 그 미네랄리티가 더 강건하게 느껴지게 되는 효과도 있네요.


90년대 후반, 혹은 2000년대 초반 빈티지라면 어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와인이었습니다.



세 번째 와인은 꼬쉬 뒤리 뫼르소, 레 후조 2008 빈티지 (Domaine Coche Dury Meursault, Les Rougeot 2008) 입니다.


향을 맡자마자, 기억의 저편으로 깊이 침잠합니다. 엊그제 먹었던 빠다코코낫에서랄지 모를 고소함, 바닐라향, 꾸덕한 질감의 크리미함과 천도복숭아랄지 싶은 농축된 과즙감, 살풋 뒤르 잇는 구운 무화과향에서 견과류향으로 타넘는 느낌...


여기서 끝이 아니라, 두 번째로 들이마신 노즈에서는 한 번 더 타임 점프. 어느 새 1994년 즈음의 어느 날, 집에서 슈퍼패미콤(아마 현대 슈퍼컴보이라는 이름이었을 겁니다.) 게임기로 캡틴 코만도(Captain Comando) 라는 게임을 즐기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갑니다.


마냥 어고 또 평화로웠던 그 시절. 당시의 꼬마들이 늘 그렇듯 부모님을 졸라서 받은 두 번째 게임기 (최초의 게임기는 현대 컴보이였었습니다. 뚜껑을 열고 팩을 끼워넣던 방식) 였고, 맨 처음에 게임기를 어찌 다룰 지도 알지 못 해 맨날 슈퍼마리오 브라더즈에서 거북이만 나오면(굼바와 다르게 무려 한 번 밟고, 발로 차야 없어지던 장애물. 심지어 화면 너머 벽에 부딪혀서 돌아오면 얼마나 무섭던지) 엄마아아!! 를 외치며 도움을 받던 때와 다르게 능숙하게 적을 해치우던 뿌듯함, 그리고 아무런 걱정이 없던 그 시절의 안온함...


단순히 향을 맡은 것만으로, 잠시간 그 시절의 행복감을 추억할 수 있도록 해준 와인이었습니다.


입 안에서는 향과 같은 질감. 볶은 서리태랄까 싶은 콩과류, 견과류의 맛에 묵직한가? 싶지만 순식간에 같이 들어온 강건한 산미에 어느 새 참기름이랄지 싶은 견과류 기름의 텍스쳐로 들어오고, 역한 기름이 아닌 부드러운 느낌에 평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버터와 같은 단맛은 맥캘란 싱글 몰트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마실 때 살풋 느끼는 뉘앙스와 비슷하게 오크향, 바닐라 향과 섞여들어오고 이 모든 것이 어그러지거나 거부감 없이, 자연스레 입 안에서 그리고 목넘김에서 적절한 층위를 이루어 진행됩니다. 모든 과정에서 최초의 산미는 이번에도 든든하게 구조감을 받쳐줍니다. 



네 번째 와인은 아르망 후소 샹베르땡 2004 빈티지 (Domaine Armand Rousseau Chambertin 2004) 입니다.


이것이 부르고뉴 와인이다! 싶다고 할까요. 그간 수많은 부르고뉴 와인에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부분을 단일하게 집대성한 느낌입니다. 뿌옇고 쿰쿰한 부엽토의 향기, 온갖 종류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작은 정원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꽃향기, 그 사이에 한 그루 자라 있는 튼실한 나무에서 솟아나는 나뭇진 향기와 껍질에서의 쌉싸래한 느낌, 그 나무를 성기게 감아 오라가고 있는 장미덩굴의 싱그러운 풀향과 끝자락에 소담스레 피어나는 장미향, 일견 순간순간 치고 지나가는 비릿하다 싶은 금속질의 미네랄리티에 이어 심지어 어린 양을 잡아 만든 프렌치 랙에서 자연스레 피어올라오는 약하디약한 동물적인 향취까지. 뒤로 갈수록 묵직하고 진중한 향으로 넘어가는 모양이고, 마지막 노즈에서는 의외로 메오 까뮤제가 연상되었습니다. 수많은 향으로 피라미드르 쌓아 올리고 마지막에 메오 까뮤제로 키스톤을 삼은 듯했다고나 할까요.


입에서는 쨍글한, 그러나 절대로 와인과 따로 놀지 않는 산미가 훅 하고 입안을 조여주면서 뒤따르는 베리 텍스쳐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에스카르고 요리에서 느껴질 법한 녹진한 질감과 유질감도 인상적이며, 마시는 내내 장미향이 지배적으로 남아 있어 마치 4월 ~ 8월 간의 장미정원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봉오리가 맺히다가 피어나고, 어느 새 시들어 떨어진 다음에는 덩굴이 그 존재를 부각하는 일련의 시간 흐름.


전체적으로 향이 가져다주는 흥취에 맛이 못 따라왔다는 점이 살짝 아쉽긴 했습니다만, 왜 사람들이 아르망 후소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한 잔이었습니다.



다섯 번째 와인은 비조 에쎄죠 2009 빈티지 (Domaine Bizot Echezeaux 2009) 입니다.


깊고 진한 바이올렛. 이것이 바이올렛이다! 라고 외치는 듯한 바이올렛 향에 두 번째 와인에서처럼 한 템포 낮게 느껴지는 온도감은 무엇이랄까, 동굴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해줍니다. 동굴 벽에서 스며나오는 듯한 미네랄리티와 약간의 민트 계열 느낌, 동굴로 떨어지는 햇살 끝에서 바작이며 말라 가는 나무껍질에서 피어나는 약간의 스모키함.


입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영빈의 아쉬움이랄까 싶은 떫음이 감지됩니다. 이번에도 강건한 산미가 쨍쨍하게 이어지지만, 앞서와 다르게 산미감 ㅅ사이로 타닌이랄지 싶은 떫음이 올라오는데, 단순하게 어리다 싶은 것이 아닌... 마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광란자] 의 초반부 수영 씬을 천천히 훑어보는 듯한 강렬하고 잠재력 있는, 싱그러운 모습이 연상됩니다. 



마지막 와인은 에곤 뮐러 샤츠호프베르거 리슬링 아우스레제 골드 캅셀 2005 빈티지 (Egon Muller Scharzhofberger Riesling Auslese Goldkapsel 2005) 입니다. 심지어 하프 바틀이 아닌 풀 바틀이었죠.


리슬링 특유의 패트롤이... 패트롤 향이 있었는데 없었지만 있었습니다...라고 해야 할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떠한 향도 자신의 존재감을 단순하게 부각시키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와 따라 와야 한다는 듯 절도 있고 균형있게 도열한 느낌. 패트롤, 오렌지 필, 꿀, 복숭아, 배, 살구, 꽃잎 등등 수많은 종류의 후각적 자극 사이로 짜릿한 산미가 뒤를 받쳐주면서, 모두가 하나의 오케스트라일지, 혹은 하나의 터키쉬 카펫을 직조하는 것일지. 각각의 향기도 개별적으로 훌륭했으나, 이 모두를 압도하는 것은 어느 하나 튀어오르지 않도록 가공한 구조감이라고 하겠습니다.


입 안에서도 마찬가지. 기본적인 "달다!" 하는 느낌을 가장 큰 틀에서 가져가고 있지만, 그 당미에 있어 느끼하거나 역함이 없이, 심히 세련되고 정제된 텍스쳐로 넘어갑니다. 마치 고도주를 마실 때 "목을 열고" 마셔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이, 온 몸이 그저 자연스레 훅 하고 받아들이는 느낌. 입 안과 혀 위에 살풋살풋 남아 있는 와인의 잔향마저도 너무 달거나 쓰거나 함이 없이 부드러이 스며들 듯 타액과 함께 사라져가는 피니시. 단맛이라는 것에 정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단 맛과 신 맛이 조화를 이루면 어떤 모습이 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교과서적인 답변이라고나 할까요.



마지막은, 모든 와인의 단체샷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