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와 투영되는 두 가지 미래
Serienz의 일상2012. 1. 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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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조문 하나하나 세심하게 읽어본 것도 아니요, 전현직 교직관련자로서 해당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학부모의 입장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몇 가지 [상식]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해볼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여 타자를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학생인권조례(이하 조례)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하는 부분은, 먼저 조례가 고의적으로 학생들의 폭력성과 각종 비행성을 조장하고 촉진하도록 명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조례가 발효되었다고 해서 학생들이 과거 비행이라 불리었던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 그러한 행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그러한 행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일례로 퍼머넌트 트리트먼트 혹은 염색에 대해, 일부 학생들이 과거부터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디만 제약되던 것이 풀리자 바로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학생들의 빈도가 올라가면서 그들을 따라하고 싶은 또래의식이 발현되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정도는 조례로 인해 특정한 행동이 자유스러워졌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 행동의 자유를 표방했다고 하여, 즉시 임의적인 성행위 횟수를 증가시키는 식의 일은 매우 드물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은, 학생인권조례가 특정한 행동의 직접적인 동인은 되지 않겠지마는 적어도 어떤 행동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 촉매제로 작용할 수는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거에 금지되었던, 제약되었던 행동을 하는 데 있어 일종의 봉인을 풀어준 것으로서 기능하리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측이 가능하겠습니다. 즉, 조례를 발효하는 데 개입된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이러한 촉매된 행동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을 갖게 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았던들, 그런 촉매활동 역시 단 몇 수십년이나마 억제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풀릴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풀려서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뭐라 하지 말라는 사람에겐 이렇게 말해주겠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인간 모두는 죽게 마련이라고. 어차피 수십년 뒤에 죽을 텐데 내가 널 지금 죽여도 나쁠 거 없지 않겠느냐고.
또한 불행한 사실은, 청소년들에 대한 이중잣대가 기울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청소년보호법을 비롯한 수많은 법령들, 조례보다 우위에 있는 모든 법규들이 청소년 혹은 미성년자와 성년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현대 서구문명으로 대변되는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에서라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의심된다면 지금이라도 유럽 연합에 소속된 국가들 중 아무 나라에 방문하셔서 물어보십시오. 이 나라는 영상물 심의 등급이 있습니까? 답은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례에서는 학생들이 성인과 동일한 인격체임을 [가정] 하고 있습니다. 모든 판단을 내리는 것이 그들의 자유이며,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에 대해 간섭하고 제제할 권리가 없다 라는 것이 요지임에, 앞으로 여성가족부와 영상물심의회, 게임등급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는 실업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등급을 나누어 청소년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문물을 제한하는 것만큼 조례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어니 있겠습니까. 학생들은 진취적이고 자주적으로 그들의 시청각 자료를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어른들은 이를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벌과 책임의 측면에서는 청소년이라 하여 벗어날 여지를 마련하고, 권리에 있어서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향유하는 집단. 제 왼쪽 눈에는 조만간 집회의 자유를 허가받은 초중고등학생들이 모이는 것이 보입니다. 왜 청소년이 꼭 18세여야 하느냐! 우리는 20세까지 청소년이면 좋겠다! 라고, 청소년이라는 특권을 조금 더 누리기 위해 발버둥칠 미래가 선연합니다. 실제로 모든 법규들에서 청소년에 대해 제제하는 규정이 사라지고, 그럼에도 청소년의 책임을 강화하는 조치는 청소년에 대한 탄압이자 억압으로 여겨지며 배척되는 사회.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정하면서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퍼뜨렸을 때엔 절대 상상할 수 없었을 미래일 것입니다.
제 오른쪽 눈에는 또 다른 미래가 보입니다. 조례의 시행 이후 폭풍처럼 불거진 사건과 사고들, 과도기라는 미명 하에 넘기기엔 너무나도 많은 사고들. 학교 선생님들은 자신들의 밥줄 보전을 위해 학생들에게 더 이상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 결석을 했다면 출결부에 결석이라 찍을 뿐이고, 왜 안왔냐고 학급 아이들에게 물었을 때 순식간에 선생이란 작자가 학생이 어딜 가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으려 한다는 여과 안된 SNS가 범람하는 시대에 산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낍니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자건 말건 누군가를 때리고있건 신경쓰지 않으며, 이미 쉬는 시간과 수업시간의 구분은 선생 자신만 하고 있음에 서글퍼하며 결국 점차 수업시간 - 명목상의 - 이 줄어들고 좀 더 빠르게 교실을 벗어나 안전지대인 교무실로 대피합니다. 그리고 학생이 문제가 발생했다면, 두툼하게 인쇄한 조례를 들어 보여주면서 기자를 비롯한 모두에게 노 코멘트로 일관합니다.
둘다 과한 상상으로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다음을 읽어주십시오.
한 마을에 공유지가 있었습니다. 열 명의 농부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고 소출을 공동으로 배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명이 생각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증가된 가치중 내 손에 들어오는 건 10%밖에 안되는데. 그리고 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노는 모습이 주변에서는 아니꼽게 보이지만, 동시에 나도 놀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됩니다. 하나, 하나, 하나 둘 이런 마음이 정직한 마음을 넘어서는 사람이 늘어나고, 결국 이 공유지는 황폐해질 것입니다.
이에 어느 한두 사람이 모두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일을 안하니까, 우리가 경작하고 우리끼리 가져가겠다고. 그러자 모두가 반발합니다. 공동으로 나누게 되어있었잖아! 결국, 잠깐이나마 분위기를 쇄신해보려는 노력 역시 사그라들고 맙니다.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것이 더 쉽고 재미있고 흥미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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