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nz의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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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에 진행한 예술의전당 페르난도 보테로전은 사실, 추석 연휴 직전에 다녀온 곳입니다. 굳이 오늘 포스팅하는 이유는 바로 어제까지가 전시 마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홍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페르난도 보테로 전은,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메모해서 갖고 나온 텍스트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실제와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아울러, 본 포스팅에는 그림을 촬영한 사진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뚱뚱하게 그리지 않는다]


처음 이 문구를 단순히 접근하게 되면, 심리적 혼란이 옵니다. 누가 봐도 두툼한 양감을 가지고 있는 그림들인데 말이지요. 심지어 정물화를 보아도, 두툼하게 표현된 칼날이라거나 당장 그릇 밖으로 뛰쳐나갈 듯한 모양새의 사과와 바나나들에서 그러한 모습이 극대화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마치 메론이나 참외마냥 극히 작게 묘사된 수박의 모습을 보면 이 문구가 가져오는 느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썰어 둔 수박은, 잠시의 시간만 지나고, 그 수분을 빼앗긴 채 시들어가고 말라비틀어지게 됩니다. 그 옆에 달항아리마냥 버티고 있는 거대한 질감의 그릇이나, 하부가 튼실한 주전자의 경우 폭력적으로 보일 만큼 말이지요. 


또 다른 정물화에서는, 큼직한 양감의 모습과는 반대로 마치 쥐가 뜯어먹은 양 자그마하게 먹힌 자국을 보이는 과일의 한 부분에서 재미있게도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저 정도 크기의 과일을 실제로 사람이 베어문다면, 만화에서나 보이듯 거하게 뜯겨지지는 않거든요. 상상한 적 없는 곳에서 현실과의 마주침을 그려낸 부분이 재미있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보테로의 인물들을 보면, 처음에는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싶습니다. 일단 볼륨감이 상당하고, 표정이 하나같이 비스무리하거든요. 남녀의 성별조차 모호한 그림. 그런데 자꾸 들여다보게 되면, 그 안에서 굳이 [구분] 을 찾고 [정리] 를 하기보다는 그 자체가 마치 인간의 원형인 양 바라보게 됩니다. 희노애락애오욕이 모두 담긴 듯한 표정들이라고 할까요. 묘하게 초점을 벗어난 눈빛에서부터 그러한 부분들이 다가옵니다. 느껴진다고 표현하기보단 그냥 다가오는 듯합니다.


얀 반 에이크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에서는, 비정상적으로 강조된 모자와 그에 비해 놀랄 만큼 세심하게 그려진 거울 속 또 다른 모습들에서 즐거운 자극을 받았습니다.


전시에서 뒤로 갈수록, 투우라던가 서커스 등의 [서사] 가 나오지 않은, 단순한 인물화에서도 전시의 흐름인지 모르게 점차 눅진한 슬픔이 다가왔습니다. 나체의 여성을 보아도, 대통령과 영부인의 모습을 보아도, 그 공허한 표정과 몸맵시에는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화사한 색상을 써도 감출 수 없는 듯한 슬픔과 비어있음. 그림은 풍만하게 표현되었으나, 마치 거대한 공갈빵마냥 속은 텅 비어버린 듯했습니다. 구도의 차이였을까요?


이러한 슬픔은 서커스와 투우라는 스토리를 입은 채 더욱 구체화됩니다. 보테로는 생애를 통틀어 본인의 그림을 자주 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역설적이게도 기부를 통한 스스로의 채움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비어버린 그림을 기부하는(비움의 비움)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채우고자 하는 듯했습니다. 이는 특유의 정서일 수도 있고(마치 우리네의 정서 중 하나라는 [한] 처럼), 아니면 그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나름의 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재주 부리는 코끼리의 주름이 가져다 주는 슬픔, 투우에 이용되는 말이 두려움을 지우고자 눈가리개를 한 채 쓰인다는 것에서 읽히는 동종상잔(동족상잔이 아닙니다.)의 아픔과 이에 대한 외면.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렸듯, 보테로는 그 자신의 수많은 그림들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합니다. 몸서리쳐지게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적당한 유머와 위트를 섞어 마주하되,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말고 받아들일 것. 적어도 제가 느낀 것은 그랬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갖고 나와, 본래는 모딜리아니 전이나 키아 전을 한개 더 볼까 했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남부터미널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지요. 이제서야, [나는 뚱뚱하게 그리지 않는다] 라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




뚱뚱하게 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를 그리되,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개체를 표현한 것으로서, 한 명의 캐릭터에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모두 겹쳐지는 양감을 그 두터움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2D의 캔버스 위에 3D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면, 저는 보테로의 그림을 추상화 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