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nz의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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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조금 이것저것 마셔보고는 있지만, 그 동안 보르도의 5대 샤또 라고 불리는 와인들 모아서 마셔 본 적이 없었습니다. 2016년에 샤또 레오빌 라스까스 2006 빈티지, 그리고 올해 4월에 샤또 오브리옹 1996 빈티지 정도가 경험해 본 일부이겠네요. 그러던 차에, 모임의 인당 단가는 꽤 있었지만 오브리옹/마고/라투르/레오빌 라스까스 와 디켐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망설임 없이 다녀왔습니다.



첫 번째 와인은 올리비에 르플레이브 샤샤뉴 몽라쉐 2010 빈티지(Olivier Leflaive Chassagne Montrachet 2010) 입니다.

와인 리스트에 모두 레드 와인, 마지막의 디저트 와인만 있어 가게에서 새로이 구입한 와인입니다.


2010년 빈티지라 10년이 채 안 되었음에도 미묘하게 녹진한 색상 변화가 있었으며, 감귤과 패션푸르츠의 살풋 이국적인 과실향이 감돕니다. 햇살 같이 보드랍게, 그러나 존재감이 명확하게 코를 쓰다듬어 주면서 뒤이은 아카시아 꿀향이 입 안에서의 기대감이 생기게 만듭니다.


입에서는 레몬, 혹은 라임의 상큼하고 달큰한 맛이 처음에 전해지고, 적절한 온도에서 보관된 부르고뉴 피노 누아에서처럼 이게 과연 존재하는 것이 맞을까 싶은 살풋한 탄산과도 같은 뉘앙스가 혀를 두드립니다. 사실 탄산이라기보다는 산미인데, 리몬첼로라던가 생 레몬, 아이셔 사탕 등등의 묵지근하고 쿵쾅거리는 산미가 아닌 포도가 갖고 있던 새콤함을 별빛처럼 으깨어서 혀 위에 올려놓아 준 것이 아닐까 싶은 산미입니다. 뒤이어 노즈에서 느꼈던 과실감에 꿀향이 더해지지만, 끝맛으로는 다시 산미감이 떠오르면서 식욕을 돋우워 줍니다.


살짝 놓아둔 후로는 잘 발효된 플레인 요거트와 같이 밀키하면서도 새콤함이 살아 있고, 열대과일의 향취도 그대로이지만 점차 요거트의 풍미가 지배하는가 싶더니 어느 새 콩기름 같은 고소함이 입 안에 머무르면서 곡물감도 살려주는 것이 플레인 팝콘을 먹은 듯한 끝맛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산미는 여전하되 중간값으로 고소함을 지니고 있던 좋은 식전주였습니다.



두 번째 와인은 샤또 오브리옹 1998 빈티지(Chateau Haut-Brion 1998) 입니다.

올해 4월에 1996 빈티지를 마셔보고 그 화사함에 흠뻑 빠져들었던 와인이지요.


서브할 때부터 올라오더니, 그야말로 봄꽃의 강물입니다. 조금 더 놓아두어도 되겠다는 산미, 그리고 철분감과 타닌감이 살풋살풋 보입니다만 잔을 받아 코에 가져다 대었을 순간의 느낌은 이 와인은 입이 아닌 코로 마시고 싶다고 느꼈을 만큼 넘쳐 흐르는 꽃향기. 잔에서 스월링하는 대로 넘실넘실 넘나드는 향기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코스모스 꽃잎처럼 여리여리한 잎을 가진 수많은 봄꽃들이 그 끝을 하느작거리고, 마치 군데군데 조경된 라임스톤인 양 중간중간 피어나는 타닌감이 중심을 잡아 줍니다. 마지막쯤에 코끝을 툭툭 건드리는 곡물향은 고소함을 기대하게 하면서, 동시에 유화에 뿌려진 샌드스톤마냥 전체 그림을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까 샤샤뉴 몽라쉐에서 느껴지던 것과 동일하게 탄산에 가까운 뉘앙스, 혀의 미뢰를 하나하나 와인 오픈하듯 열어주는 기포감이 초 단위로 혀 위에서 놀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듭니다. 에델바이스 류의 허브향에 뒤이은 감귤의 느낌이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듯 입 안에 머무르다가 자연스레 사그라들면서 미네랄리티와 타닌감도 함께 퇴장하니 한 샷의 영상미마저 느껴집니다.


완연한 4월의 봄에 온갖 꽃이 투각으로 엮어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머리에는 꽃 왕관을 팔에는 꽃 팔찌를 발목에는 꽃 발찌를 한 채 투각된 드레스 사이로 자기도 모르는 새 달려 붙여진 수많은 꽃잎들을 장식 삼아 휘돌며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가 연상됩니다. 



세 번째 와인은 샤또 마고 1989 빈티지(Chateau Margaux 1989) 입니다.


노즈를 맡는 순간,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확대 재생산 없이, 그저 여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을 뿐인데도 그 배경과 구도와 자세, 여성이 취한 오너먼트로 인해 풍요와 풍만이 연상되는 그림. 인간의 리터칭이 없기에 오히려 더 단아하고 절제되면서도 여성미를 뿜어내는, 귀부인의 그것처럼 보여지는 모습. 이래서 사람들이 마고를 여성적이라고 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확연히 받았습니다.


고소함, 단정한 향취에서 올라오는 단아함과 청아함, 그럼에도 숨길 수 없이 비어져 나오는 과실의 향기로 인한 볼륨감은 마치 일부러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연상되는 굴곡진 실루엣, 소위 말하는 S라인이 떠올랐으며 그런 와중에도 코 끝에 살짝 올라앉는 타닌감은 평화롭고 순박해 보이는 여성이지만 신고 있는 하이힐 한쪽에는 금속질의 강렬한 포인트를 주고 있을 법하다는 긴장감도 부여합니다. 그래서인지 잘 마른 가죽향, 커피향과 밀키함이 함께하는 초콜릿 향이 허브향과 함께 복합적으로 감돌아옵니다.


입에서는, 오. 젊은 공작 부인이 부드러운 손길로 빌로드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혹은 결혼 적령기가 된 귀족가의 영애일 수도 있겠네요. 머리 위로는 장인의 세공이 살아 숨쉬는 샹들리에가 쏟아지는 햇살을 맞아 샴페인과 같이 빛나고, 그 아래 파티에라도 나갈 듯한 기품 있는 옷매무새로 당당하게 서서 화가에게 그림을 요구하는 귀부인의 자태입니다. 마지막에 코로 느낀 커피향과 밀크 초콜릿, 허브향이 그대로 살아나면서 뜬금없이 떠오른 단어는 보랏빛 배경의 노란 꿀벌이었습니다. 보라색은 황권을 상징하고 꿀벌은 앙시엥 레짐에 대항하는 존재로 채택되었으니, 그야말로 나폴레옹이 아니겠는가! 라는 속으로의 감탄사와 함께 왜 혹자는 마고를 와인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네 번째 와인은 샤또 라투르 1988 빈티지(Chateau Latour 1988) 입니다.


마시기 전에, 남자들과 여자들의 와인에 대한 호감에서 샤또 마고는 남자들의 압도적인 선택을 받은 반면 샤또 라투르는 여자들의 선택이 집중되었다는 이야기를 가볍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향을 맡으니 1초도 되지 않아서 왜 그런 선택이 나왔을지 알 것 같았습니다.


헬스 보충제 따위는 먹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오로지 순도 100%의 운동만으로 일궈 낸 잔근육에 전신이 적절히 배어져 나온 땀방울로 빛나는 남자가, 오롯이 자기를 바라봐주며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확연히 존재하게끔 살풋이 웃고 있는 모습. 남자들이 롤 모델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 코로 순식간에 이미지화하여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


밀크 초콜릿과 카카오의 번들거리는 유질감, 유칼립투스의 곧게 벋어나가는 강인함과 힘찬 모습, 그러면서도 감귤에서 올라오는 산미가 슬쩍슬쩍 치고 들어오는 것이 전형적인 능글맞은 B형 남자... 라고 하면 혈액형의 이미지에 너무 매몰되는 듯하지만, 그야말로 라투르의 이미지는 [나 잘난 거 이미 잘 알고 있고 나 좋다는 여자도 많긴 한데 지금 내 눈에는 너밖에 안들어와 >_<!] 라는 남자의 모습입니다.



다섯 번째 와인은 샤또 레오빌 라스까스 1982 빈티지(Chateau Leoville Las-Cases 1982) 입니다.


아까의 샤또 마고가 중세 말, 혹은 나폴레옹 시대의 귀족이었다면 레오빌 라스까스는 산업시대, 즉 1800년대 말경의 귀족 가문이라는 인상입니다. 라투르보다는 조금 세련되었지만 그래도 남성적인 면모에, 바삭바삭한 향취와 고소함, 드라이플라워에서 날 법한 꽃향과 건자두/건포도의 과즙향에 허브향이 어우러듭니다.


입 안에서는 뭐라고 할까요... 전형적인 보르도 블렌딩? 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이 보르도 와인이다 라고 정의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마고와 라투르르 지나서 하나의 모델로 정립된 와인을 경험하는 느낌. 영화나 소설에서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를 보는 것처럼, [보르도 와인] 이라는 배역을 온전히 소화해내는 배우를 보는 느낌입니다. 그간 여기저기서 마셔 봤던 보르도 블렌딩 와인들의 완성형을 엿본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와인은 샤또 디켐 1988 빈티지(Chateau d'Yquem 1988)입니다.


예전 샤또 쉬드로와 샤또 리외섹을 둘 다 마셔 봤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리외섹보다는 쉬드로에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 뉘앙스였습니다. 특유의 꿀향에 석청인가? 싶을 정도의 미네랄리티가 배어들어 있고, 동시에 자기 혼자 어디 동굴에서 꺼낸 양 신선한 느낌이지요. 피망과 민트 같은 상상이 잘 안되는 식재료들도 연상되는 맛이지만, 뒤로 갈수록 알프스 인근 어딘가에서 팔 것 같은 민트 초콜릿의 이미지가 생겼습니다.